
31. [신학연구]: <한(恨)의 神學>
1). 서언: “그는 한 많은 세월을 살다가 갔다.”, “그 때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인데 못한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등등의 말을 하고, 이런 말을 할 때에 욕구불만을 토해 내기도 한다. 무슨 이유이든지 하고 싶은 일을 못한 것을 ‘한스럽다’라고 말을 한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 못한 것, 못해 본 것들에 대한 욕구불만을 ‘한’(恨)의 심리라고 하겠다. 하지만, 욕구불만이 자기 개인적인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외부세력(强者)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야기될 때는 ‘한’의 심리는 격증(激增)된다.
그래서 ‘한’은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문제는 이 ‘한’을 <어떻게 해석하며, 그 한을 어떻게 풀 수(解恨)있는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사료된다. 그래서 필자는 ‘한’의 개념을 좀 더 깊이 풀이해 가면서, 인간의 이런 ‘한’의 정황을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시는가.>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파고 들어가 보고 싶다. 그리고 ‘한’에 대한 성서말씀의 실례를 들어서 해석하면서, 결국 ‘한의 신학’이란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규명코자 한다.
2). ‘한’의 개념: ‘한’은 소극적인 의미로는 마음의 상처라고 하겠고, 적극적으로는 정신적 어혈(瘀血)이라고 하겠다. 전자는 마음의 맺힘이며, 후자는 피의 맺힘이다. 이희승 국어사전에는 ‘한’을 원한(怨恨), 한탄(恨歎)이라고 풀이하면서, 원한은 원통하고 ‘한’ 되는 생각을 줄임말이라고 한다. 예컨대 “그것은 천추(千秋)의 ‘한’을 남기는 일이다.”라고 말할 때 의미이다. 한탄은 원통한 일이나 뉘우침이 있을 때, 한숨짓는 탄식을 뜻한다고 했다.
소극적인 의미로는 뉘우침, 소원, 한숨, 탄식이라고 하겠고, 적극적인 의미로는 한탄, 원통함, 원한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한(恨)은 자기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을 자학(自虐)이라고 하고, 원(怨)은 타인, 사회조직,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오는 것을 가학(加虐)이라고 한다. 아픔의 기나긴 추억, 회한(懷恨), 외부세력에 의한 강압(정치적 한), 억울한 사람들의 찌들은 마음, ‘한’의 밑바닥엔,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論介, 春香, 柳寬順, 安重根(정치적 한), 집단적으로는 민중의 마음속에 맺혀 있는 정서, 좌절과 희망에 따른 증오심, 원상회복에 대한 열망을 ‘한’이라고도 한다. 또한 한국 고유의 정서인 <시름, 애수, 청승맞다.>라는 표현들도 ‘한’의 근접한 의미라고 보겠다. 고려가사인 ‘가시리’의 내용은 ‘한’이 잉태된 기다림은 자기 내부와의 끊임없는 갈등이 계속하면서, 체념적으로만 끝나지 않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또한 ‘한’이다.
3). 神學의 槪念: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체계적으로 표현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본래 기독교가 형성될 때, 희랍 철학자들로부터 받아들인 개념으로‘theologia 라고 표기된다. 어원적으로 분석하여 본다면 theologia는 θεός(Theos, 하나님)에 관한 λόγος(Logos. 말씀, 진술), 즉 하나님에 관한 논술(論述), 즉 하나님에 관한 사람의 논리를 말한다. 이런 개념은 희랍 철학으로부터 유래한 개념이다. theologia란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학자는 창시자인 Plato이었다.
이 개념은 초대교회에서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theologia라는 개념은 신론(神論), 특히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을 뜻하였다. 그래서 Augustine은 신학을 가리켜 “신성에 관한 논술 또는 설명”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므로 신학이라는 것은 절대적 존재라고 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이 자기가 이해하는데 따라서, 이렇게 표현하고 저렇게도 표현하는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체계를 의미한다. 본래 신학이란 “하나님에 관한 학문”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기독교 진리 전반에 대한 학문”으로 발전하였으며 전통적으로 교의학(敎義學), 오늘날엔 조직신학(組織神學)을 뜻하게 되었다. 위에서 이미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라고 언급하였지만,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그의 세계와의 관계 속에 있게 되었다. 인간 및 그의 세계와 관계없는 “하나님 자체(自體)”(Gott an sich)에 대하여 聖書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신학은 인간 및 그의 세계와의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연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J. Calvin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 자기 자신의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이 없이는 인간 자기 자신의 지식도 없다.”고했다.
절대적인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상대적 존재인 인간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스스로가 인간의 세계에 대하여 당신 자신을 계시(啓示)함으로써, 인간은 그 계시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 사람의 언어와 일정한 인간을 통하여 나타내셨다. 즉,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었다. 신학은 이처럼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응답하는 말이요, 설명인 것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인간의 한(恨)은 하나님의 애정 어린 관심사이었고, 여기에 <한(恨)의 신학>이 태동(胎動)하게 된 것이다.
4). 恨의 神學: (1). 복수(復讐)하시는 야훼: 최초로 야훼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분노한 감정을 복수하셨다.(창6:5-7, 24) 소돔을 멸망시키고(창19:1-29), 이집트의 처음 난 아들과 짐승들을 모조리 죽게 하고(출12:29, 열 번째 재앙), 야훼를 바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맥은 빠져 원수와의 싸움에서 져서 적의 지배를 받게 하는 화를 내리겠다고 하고(레26:14-16), 미디안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를 갚아 주는 등 무섭고 잔인하게 복수를 하셨다.
(2). 해한(解恨): 야훼 하나님의 복수는 예수님의 출현과 함께 끝이 난다. 즉 ‘한’은 신앙으로 극복된다는 것이다. 복수의지(復讐意志)로 연결되는 것을 방지시켜 준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제일차적 해한(解恨)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대업을 완성하심으로 제2차적 해한(解恨)을 완료하셨다는 것이다. 이로써 기독교는 원한(Resentment)으로부터의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해한자(解恨者) 이신 구세주이다.
사랑의 복음의 화신으로서 나사렛 예수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죄 많은 자에게 축복과 승리를 가져오는 메시야였다. 유대적인 증오와 복수심이 예수를 통하여 새로운 사랑이 발생하였고, 그 사랑 때문에 우회적(迂廻的)인 복수를 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극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시었던 것이다.(인간의 불의와 죄악에 대한 和解) 그리스도의 이 사랑이 ‘한’ 풀이가 되었던 것이다.
(3). ‘한’의 신학에 대한 성서적 근거: 성서에 있어서 ‘한’의 민족인 이스라엘이 최초로 하나님과 만남은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일과 출애굽 사건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한’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셔서 새 역사의 주인이 되게 하신 대표적인 말씀이다. 신구약 간 곳마다 우리는 ‘한’에 맺힌 무리들이 하나님께 하소연할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 내려 오셔서 그들을 만나 주시고, 한 새 역사의 사건을 이룩해 주신 것을 보게 된다.
구약 성서에서 제일 먼저 ‘비탄의 정서’ 즉 ‘한의 정서’는 창세기 4장, 카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한 맺힌 아벨의 피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 이 한 맺힌 호소를 들으신 하나님은 그 한을 풀어 주셨다. 창세기 21장, 사라가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상속자가 될까봐 아브라함-남편을 설득하여 광야로 쫓아내었다. 허허 벌판 광야에서 허기진 모자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그 恨을 풀어 주시고, 축복해 주시었다.
떨기나무가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우리는 한 맺힌 이스라엘(히브리인) 노예들의 부르짖는 울음의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출애굽(탈출, Exodus)의 해방이 있게 되었다. 예레미야 애가(哀歌)에서 예레미야의 눈물은 조국 강산이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제3차나 짓밟히고 동족이 사로잡혀 간 한 맺힌 절규였고, 하나님은 바벨론 고레스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해방과 자유를 선포케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중은 장기간 특권계급(왕,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파)의 율법이란 가식적(假飾的) 잣대의 올가미에 묶이어서 한 맺힌 억압과 신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결국,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로마 식민지 억압의 정책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중심한 정치무대는 진실과 양심 그리고 정의는 찾아 볼 수 없는 악의 파국은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저변에 밀려난 민중은 갈릴리 벽촌을 구심점으로 하여 집과 부모처자를 버리고 과감히 하나님의 새 역사 창조란 대업에 동참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갈릴리 어부들이 깊은 심층에서 만나는 계기가 되었고, 종래는 하나님은 근원적인 인간의 한(恨)풀이(救贖)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상에서 이루게 하셨던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사는 삶 -사람은 2번 태어나야 참 사람, 새 사람이 된다. 첫 번째 태어나는 것은 물론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는 아직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적 존재로서의 생명체일 뿐이다. 이것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하는 것은 그가 앞으로 어떤 만남(Encounter)의 과정을 가지게 되는 여하에 결정이 된다. 그 만남이 천박할 때는 그의 인간됨도 천박할 수밖에 없고, 그 만남이 깊고 폭넓은 만남일 때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정말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 환언하면 진정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기점(起點=시작하는 점, 基點=기본이 되는 점)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바울이 그랬다. 그러기에 어디서 하나님을 만나느냐 하는 것은 사람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물음인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예수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하는 참 생명을 갈구하는 상황이다. 요6:22-59에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양식에 대한 교훈을 하셨다. 인간 세계에서 만나는 모든 대상(對象)은 다 소멸하는(썩어 없어지는) 것뿐이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 안에 거주하는 생(生)이다. 인간세상의 적멸(寂滅)하는 상대(相對)를 바르게 직시(直視)할 때나, 우리들의 삶이 극한상황(極限狀況)에서 신음하고 허우적거릴 때 주님은 찾아오신다.
극한상황(極限狀況)! 이 곳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다. 인간들이 한(恨)이 맺혀 아우성치는 곳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자리요, 우리들의 새 삶이 출발하는 기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첫째로, 하나님을 찾기 위한 절규가 있어야 하고, 둘째로, 우리들 삶에 있어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올바른 가치판단을 해야 한다. 재물과 권력이 가장 귀한 것으로 오인치 말아야 한다. 셋째로, 가치의 혼돈된 사회에서 악과 선, 진실과 거짓, 동지와 적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삶을 정말 축복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삶을 비참하게 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각성하고 인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새 내일을 위한 청사진, 소명감과 계약의 백성이 되도록 순간마다 결단하면, 주님은 찾아오셔서 결실케 하신다.
4). 결론: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그것이 정치적이든 ‘한’(恨) 풀이는 주님께 간구하여 해한(解恨)하여 주시도록 맡기는 것이 ‘한의 신학’의 요체이다. 구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직접 한풀이를 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신. 인(神人) 간에 개재(介在)되었던 죄악이 그리스도께서 대신 맡으셔서 십자가에서 단 한 번의 화해의 제사를 드림으로 영원히 해결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우리들의 삶이 한스럽고 극한상황(極限狀況)에서 신음하고 허우적거릴 때마다, 주님께 기도해야겠지만, 이런 정황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공(時空)이며, 그를 때 마다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래서 우리는 간절히 절규의 기도를 드려야 하겠고, 우리들 각자의 삶의 정황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선택해야 하겠다. 그리고 선악(善惡)과 진위(眞僞)에 대한 예리한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다. 또한 삶은 결단의 연속이기에 순간순간 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결단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사료된다. 끝
2016. 8. 25.
山下연구소장: 양 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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