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자기 십자가
(본문: 마16:21-28, 막8:31-38, 눅9:22-27)
-설, 추석명절을 기해서 부모, 형제, 친구, 이웃 등의 만남에서 쾌락의 원리, 이기적 원리를 떠나서 선한 양심이 편중하는 교분이 있기를 바래서 이 글을 올렸습니다.-
1). 서론: 주후 3C.의 마카리우스(300-390)는 이집트 출신으로 시리아 사막교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빈들에서 자라난 것처럼(눅1:80) 당시 많은 무리들이 이집트 사막에 찾아와 거대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이러한 수도사 중의 한 분으로서 사막 수도원 창시자인 안토니의 제자요 벗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번은 마카리우스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서 주님이 더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를 본 마카리우스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다고 합니다.
마카리우스는 또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하기를, "주님, 제발 저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넘기십시오."라고 말씀드렸더니,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 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에 무척 힘들게 매시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다고 합니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을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다시 한 번 애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윽고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카리우스를 향하여 몸을 돌이키면서,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 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저야 한다.”하기시기에, 마카리우스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그의 십자가가 모래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 와서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는 간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라고 여쭈어 보았더니, 주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단다.”라고 하시더랍니다. 이것이 바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본문의 말씀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2). 본문(Text): 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계기로 하여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의 비의를 예고하셨습니다. 수난의 암시적인 말씀은 이미 있었으나(마9:15, 10:38, 12:40), 공개적으로 일반적인 수난의 예고는 본문에서 처음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져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고(마17:23-24), 세 번째는 능욕과 채찍질과 십자가 등, 수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셨습니다.(마20:17-19)
②. 본문의 수난예고에 대한 베드로의 만류에 따른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만류의 말은 “그리 마옵소서.”(ἵλεώς-힐레오-스)라고 한 말의 뜻은 “하나님이 당신에게서 이 일을 제거 하리이다.” 또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으리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베드로의 말은 ‘혈육’의 사랑과 도리이었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계시’는 아니 이었습니다. 진리를 떠난 사랑은 본의 아닌 방해가 되는 법이지만, 베드로의 이런 인정(人情)을 가진 것은 귀한 일이었고, 이것이 주님을 3번 부인한 이후, 통곡의 회개에서 다져지고, 그래서 수사도의 지위를 견지했던 것입니다.
③.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16:23)-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에 대한 주님이 칭찬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큰 축복과 큰 책망, 하나님의 그릇과 사단의 그릇,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반석과 부딪치는 돌, 등 인간이란 누구든지 이 양극단을 쉽게 왕래하게 됩니다. 즉 “너는 조금 전처럼, 거대하고 기초적인 바른 위치에 있는 고귀한 반석은 아니다. 도리어 너는 제자리에서 나와서 내가 가려는 길 한가운데서 나를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의 뜻이었습니다. ④. 그래서 주님은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는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⑤. 일직이 유대 군중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오병이어’의 기적과 온갖 병자들을 치유하신 권능의 주님을 ‘지상의 왕’(王)으로 모시고, 로마에 항거하여 일시에 메시아 왕국을 건설할 심산(心算)의 분위기를 아시고 혼자 산으로 도피해 가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요6:15) 또한 주님께서는 비장한 각오로 수난의 예고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도 그처럼 쉽게 허물어지니, 여타의 제자들은 주님 당신을 따르는 목적이 인간적 성공의 길이 훤하게 열렸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통찰하셨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3). 본론(Context): 유대민족은 역사적으로 이집트,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 등의 종살이에 지친 민족입니다. 오늘 여기 본문의 역사적 배경도 로마 지배하에 고달픈 삶을 영위해 오는 중이었습니다. 그간 유대 군중들은 이런 압박과 설음에서 탈출시켜 줄 모세와 같은 민족의 지도자를 고대하던 중, 요단강 근처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을 은근히 자주독립을 위해 이끌 영도자로 생각했으나, 일찍 분봉 왕 헤롯에 의해서 젊은 죽음을 가슴 저린 심정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하층 구조에 속하는 서민계급들이 주로 살고 있는 갈릴리 해변을 중심해서 ‘예수’라는 나사렛 출신의 젊은 청년에 대한 놀라운 소식들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각종 병을 치유하시며, 특히 소경, 중풍병자, 하물며 죽은 ‘나사로’까지 다시 살리셨다는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또한 산상에서 귀한 보훈(산상보훈)을 아주 권위 있게 말씀하심에 모여든 군중들을 감탄하게도 한바가 있었습니다. 유월절 절기가 닥아 오는 즈음에, 보리떡 5조각과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5,000명이나 먹이고도 12바구니나 남았다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대 기적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4-15) 유대 군중들은 이만한 권능을 가진 사람이면 로마를 대항해서 자주독립시킬 지도자로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예수님을 강요해서라도 왕(王)을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긴급하게 자리를 뜨지 않으면, 제자들까지도 여론에 편승하여 ‘그리스도관’이 흔들릴까하여서 홀로 산으로 도피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군중심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시에 “이스라엘 왕이시여!”를 부르짖던 군중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요12:13) 민중들이 예수님을 ‘Messiah’로 환영한 것은 틀림이 없으나, 군중들의 Messiah관과 그리스도 자신의 Messiah 의식(意識)에는 큰 차이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폭력적인 왕도를 통해서 로마학정에서 해방되는 것만 생각했으나, 그리스도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이처럼 Messiah 왕국을 실현시키는 방법 차이가 현저하게 가로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의 의중(意中)을 은근히 타진하는 의미에서 ‘세상의 기독관’(基督觀)을 문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에게 직설적으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가 대표해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분명하게 다져놓기 위해서 수난에 대한 예고를 미리 말씀하게 된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흡족할만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직후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심에 베드로의 “그리 마소서!”라는 반응의 뜻은 “하나님이 당신에게서 이 일을 제거 하리이다.”라는 스승에 대한 제자의 애정에서, ‘하나님은 죽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라고 만류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교훈을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기독자들 중에는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다 잘된다는 ‘성공의 기독교’로 착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인생고(人生苦)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며, 오히려 예수님의 고난의 유산(遺産)인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입니다. 물론 신실한 믿음의 생활을 주님께서 영육 간에 축복해 주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의 기본 동기가 유대민중들처럼 지상의 안신입명(安心立命)과 육적인 행복추구에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는 하나님의 구속은총에 대한 감사에서 고난도 달게 받겠다는 의미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뜻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이미 지고 있는 ‘자기’(Self, 自我=자기의식 뜻함.)란 ‘짐’을 ‘버린다.’는 것이다. 심리학적인 면에서 내적으로는 부모라는 거울을 통해서 형성된 자기실존이 있고, 환경적 요인에서 형성된 특이한 개체(個體)인 자기가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否認)한다는 것은 ‘자기를 무시(無視)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저마다 지고 갈 것이 있고,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왕 심리학적인 인간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S. Freud(1856-1940)의 정신분석학적인 인간관을 잠시 살펴보도록 합시다.
인간의 인격은 첫째로 Id(他我)라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는 무의식적이요. 본능의 원동력, 비논리적, 비도덕적 및 동물적인 원초적 자아로서 삶에 있어서 괘락의 원리(Principle of Pleasure)가 지배하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로는 Ego(自我)라는 부분은 원래 Id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이 성장함에 따라서, 현실과 접촉하는 동안에 Id로부터 분리된 것인데, 인간의 출생 6~8개월에서 2, 3세에 Ego가 형성됩니다. 자아는 괘락의 원리 대신에 현실이 원리(Principle of Reality)의 지배를 받는 Ego는 개인의 욕구충족을 위한 그 대상물을 발견하는 것이나, 생산하는 이기적인 기능의 영역입니다.
세 번째로 Superego(超自我)의 부분으로서, 사회에서 지켜지거나 요구하고 있는 도덕률이나, Taboo(禁忌)시 하는 것, 및 부모에게서 받은 도덕교육을 토대로 형성된 도덕적 선(Morality Principle)을 추구하는 부분입니다. ‘초자아’는 자아에서 발달되어 나오는 것인데, Ego로 하여금 Id를 억제하도록 압력을 가하여 현실보다는 이상세계(理想世界)를 대표하며, 현실적 성취나 괘락보다는 완전함을 추구합니다. 이와 같은 목표를 위해서 ‘초자아’엔 자아이상(Ego-Ideal)과 양심(良心)이 지배하는 영역입니다.
‘자아이상’이란 적당한 행동을 승인하고 권장하며, 양심이란 Ego가 마땅치 못하다고 보는 행동을 처벌하고 촉구하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이 ‘초자아’는 부모의 사회적 가치관과 도덕률을 어릴 때부터 그대로 닮는 것입니다. 부모 외에도 사회적 인사인 선생님, 목사, 경찰관 등의 권위적인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심리학적 이론에서 볼 때도, 사람은 저마다 인격체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마다의 ‘부인할 것’(버릴 것)이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의 인격체는 Id가 강해서 쾌락추구를, Ego에 의해서 이익추구를, Superego에 따라서 지고한 양심이, 편중(偏重)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심리학적 이론에 입각해서 볼 때도, 또한 저마다 <자기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민을 대속(代贖)하는 십자가로서 절대적인 것이었으나, 제자들과 오늘날 우리들의 십자가는 각양각색인 것입니다. 각자는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 중, 가롯 유다는 정치적인 남쪽 유다지방 출신이어서(환경적 요인), 자기 이념적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승을 팔았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루살렘에 상경하면서, 자기 아들들에게 좌우정승 자리를 예수님께 요구했고(마20:21), 마가복음 10: 35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요구한 기사가 나옵니다. 이들에게는 가정 집안 내력이 권력욕이, 회의주의자 ‘도마’는 남을 불신(不信)하는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고 보겠습니다. 이처럼 우리들 각자도 자기를 부인해야 할 문제점들인 모든 불의, 탐욕, 시기, 비방, 교만, 자랑, 이기적인 생각, 욕망, 자기주장 등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극복해야 할 자기 십자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십자가를 진 것을 표현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라고 했습니다. 이는 서론에서 마카리우스처럼, ‘자기 십자가를 질 때,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단다.’라는 뜻인 줄 압니다. 이미 누가복음 9:23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되 매일(날마다) 매시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31) 한두 번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시 그것도 평생을 그렇게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육신의 혈기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께서 임재하심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4). 결론: 유대민중들이 예수님을 ‘Messiah’로 환영한 것은 틀림이 없으나, 군중들의 Messiah관과 그리스도 자신의 Messiah 의식(意識)에는 큰 차이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폭력적인 왕도를 통해서 로마학정에서 해방되는 것만 생각했으나, Messiah이신 그리스도가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이처럼 Messiah 왕국을 실현시키는 방법이 건널 수 없는 단애(斷崖)가 가로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의 의중(意中)을 은근히 타진하는 의미에서 ‘세상의 기독관’(基督觀)을 문의했으며, 또한 제자들에게 직설적으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표해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지만, 주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자, 그는 곧바로 인간 혈육의 생각으로 “안 될 말씀입니다.”라는 의미로 죽음을 만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차제에 확고한 주님의 정체성(Identity)을 밝혀야 하겠다는 뜻에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주님을 믿고 따름이 한갓된 인간적 성공과 축복만 바라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신앙의 길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따름에는 저마다의 쾌락추구, 이기주의 등의 인간적인 가치관들을 버리고,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대한 감사요. 은혜 받는 길이라고 사료 됩니다. 그리고 한 두 번이 아니라, 일생을 매일 매시 져서 주님께로부터 칭찬받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 합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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