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31. 스데반 순교의 파문(波紋)

solomong 2025. 1. 10. 11:22

 

31. 스데반 순교의 파문(波紋)

(본문: 행11:19-12:1-19)

 

1). 서론: 본문 11:19에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란으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의 말씀은 스데반 순교가 가져온 波紋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波紋이란 ‘어떤 일이나 주위를 동요할 만한 영향 또는 그 영향이 미치는 정도나 기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함으로, 다메섹 도상의 사울의 회심, 안디옥 교회의 설립,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가 당한 박해 등등의 波紋을 열거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잔잔한 물결 위에 돌멩이를 던지면 수면에 잔물결이 일면서 그 물무늬가 옆으로 퍼지는 것이나, 바람 때문에 물결이 잘게 이는 것을 연상해 봅니다. 처음엔 작은 원에 불과하지만 점점 커져서 나중엔 도무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이 波紋입니다. 물론 처음에 그 물결을 일으킨 힘의 강약에 따라 波長 역시 달라지겠지만, 나중에 그 波長이 어디까지 미치게 되든지, 크고 작은 모든 波紋이란 그것이 퍼져나가는 시초에는 작은 원에 불과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초대교회의 비극이었다기보다는 복음 전파의 기회가 되었다고 보겠습니다. 이를테면, 꽃씨 꼬투리가 터져서 그 씨알이 사방에 뿌려진 셈이지요. 이 餘波로 예루살렘교회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각지로 흩어져,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설립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스데반의 고결하고 순결한 신앙이 여타의 잔잔한 가슴에 신앙의 파문을 일으킨 것을, 현대 우리들의 실존적 상황으로 조명해 보았으면 합니다.

 

2). 본론(Text): ①. 11:19-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복음전도의 파문-과거의 역사적 사건에로 되돌아가(행8:4), 역사의 다른 흐름의 파문이 야기된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 진 사람 중에,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전도하게 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해안선을 따라서 베니게, 구브로 및 안디옥에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헬라계 유대인에게 한정했지만, 이방인에게 본격적으로 전도한 것은 훨씬 후, 바울에 의한 것이란 사실은 우리 역시 잘 아는 일입니다.

 

②. 11:19- “안디옥” 교회의 설립-안디옥은 로마제국 동방지역의 수도이며,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로마지방 장관이 주둔지역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안디옥’은 로마제국 가운데서,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다음가는 3째 큰 도시로 인구가 50만 명을 넘는 대도시이었다고 합니다. 주민의 대다수가 수리아인들이고, 커다란 유대인의 부락이 있었으며, 이곳 문화는 주로 헬라적인 것이었다고 합니다.

 

시민들은 부유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무게 중심은 급속히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옮겨졌으며, 교회전통은 안디옥과 베드로를 연결시켜, 베드로가 초대 감독이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신빙성은 약하다고 합니다. 하여간, 이런 도시에 안디옥 교회가 처음으로 이방 땅에 전해 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설립되기까지 3단계의 과정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⑴. 빌립이 사마리아에 전도했으니, 그것이 첫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실제로 반유대인 및 반이방인이므로, 유대와 이방의 架橋역할을 했다고 하겠습니다. ⑵. 고넬료가 먼저 교회를 찾아간 것이기에, 베도로가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지, 교회가 그에게 전도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하였으니, 그는 유대교 문 앞에 섰던 자였습니다. ⑶. 교회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것도 교회의 조직이나 집단을 통한 전도가 아니라, 스데반의 사건으로 無名의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이방전도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단지 아는 것은 구브로와 구레네 몇 헬라계통의 유대인들이 안디옥에 가서 유대인들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여 안디옥 교회가 설립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핍박은 안디옥에 새 예루살렘 교회를 건설하게 된 셈이 되었습니다.

 

③. 11: 22, 25, “바나바”의 착한 인품의 파문-예루살렘 교회가빌립의사마리아 傳道 상황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한 것같이, 이제 안디옥 교회의 설립상황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태생의 헬라계통 레위파 유대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12사도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사도의 지위에 오른 것 같이 보여 집니다.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로서,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람에 대한 인격이 구비한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사울은 고향 땅 ‘다소’로 가서 10여 년간의 隱居하면서 그간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복음전파를 위한 준비의 삶을 살고 있는 사울을 세계적인 대사도 바울의 雄志를 터뜨리며 출발의 길을 안내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다소까지 먼 길을 가서, 사울을 ‘찾으러’(ἀναζητῆσαι-한 집 한집 물어서 찾는 것을 뜻하며, 또는 <사방으로 물샐틈없이 그를 찾기까지 찾아다니고자>란 의미) 집요(執拗)하게 애를 썼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회개한 후, 첫 번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에도 그를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옹호한 사람도 그였습니다.(행9:27) 이제 안디옥 교회의 설립과 확장에 따라서, 비록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을 환영하지 않았지만(행9:29-30), 안디옥 교회로 안내했고, 바나바 자신과 더불어 안디옥 교회에서 1년간 힘써 일하면서, 안디옥 교회를 근거지로 하여서 이방세계 대 전도에 나섰던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의 역사였습니다.

 

폭스 잭슨이라는 학자는 ‘바나바’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는, “바나바는 신약의 가장 매력 있는 인물 중에 하나이다. 그는 남의 長技를 찾아보는 특색이 있었다. 재능으로는 바울보다 못했을지 모르나, Christian의 덕으로는 우월했다. 그는 질투를 모르고, 남의 허물을 용서하며 장점을 보기에 빨랐고, 형제간의 평화를 위해 타협에 주저하지 않았다. 역사의 바울은 세계 진보에 공헌한 바 크나, 바나바와 그 동류들은 세상을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가 바울의 위대함을 잊지 못함과 동시에 바나바가 기독교의 세계진출에 개척자였음을 잊을 수 없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④. 12:1- “헤롯 왕”(아그립바 1세)의 박해 이유-신약성서에는 5명의 헤롯 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⑴.대 헤롯(37 BC.-AD. 4): 베들레헴의 어린이를 학살한 자(마2-16-18), ⑵. 헤롯 아켈라오(AD. 4-6): 대 헤롯의 4째 아내인 사마리아 여인의 소생으로 아비를 후계했으나, 곧 폐위 정배됨.(마2:22), ⑶. 헤롯 안티파스(4 BC.-AD.34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 아켈라오의 동복동생으로 질녀이며 제수인 헤로디아 빼앗고, 세례 요한을 목 벤 자(마14:1-12), ⑷. 헤롯 아그립바 1세(AD. 37-44): 대 헤롯의 손자, 본문의 헤롯임. ⑸. 헤롯 아그립바 2세(AD. 49-100): 가이사랴에서 바울의 송사를 접함.(행26:28).

 

본문의 헤롯 아그립바 1세는 10세 때, 조부 헤롯대왕이 죽기 조금 전에 로마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고, 생애의 2/3를 로마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갈리굴라(Galigula)를 황제가 되는 데 공을 세워서, 그 보답으로 37년에 빌립의 영토(북부 갈릴리지방)를 받아 분봉 왕이 되고, 39년 경 안티파스를 서반아로 추방하도록 하여 그 영토인 갈릴리와 베뢰아를 얻고, 41년 경 ‘갈리굴라’가 죽기 전에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얻게 되어 대 헤롯이 지배하던 전 영토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회주의자로서 Palestine 이외에서는 철저한 Hellenist이었고, 유대 땅에 와서는 율법의 의식과 습관을 은근히 준수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초대교회를 박해한 것은 유대인의 歡心(人氣)을 얻기 위함이며,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금한 것이 그 이유이었습니다.

 

3). 본론(Context): 본문 말씀 중에,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란으로 말미암아”라는 구절(11:19)은 스데반 순교가 가져온 波紋을 의미합니다. 波紋이란 ‘어떤 일이나 주위를 동요할 만한 영향 또는 그 영향이 미치는 정도나 기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함으로, 다메섹 도상의 사울의 회심, 빌립의 사마리아 지방의 전도와 안디옥 교회의 설립,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가 당한 박해 등등의 波紋을 열거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잔잔한 물결 위에 돌멩이를 던지면 수면에 잔물결이 일면서 그 물무늬가 옆으로 퍼지는 것이나, 바람 때문에 물결이 잘게 이는 것을 연상해 봅니다. 처음엔 작은 원에 불과하지만 점점 커져서 나중엔 도무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이 波紋입니다. 물론 처음에 그 물결을 일으킨 힘의 강약에 따라 波長 역시 달라지겠지만, 나중에 그 波長이 어디까지 미치게 되든지, 크고 작은 모든 波紋이란 그것이 퍼져나가는 시초에는 작은 원에 불과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개인적으로는 슬픈 일이었으나, 초대 교회사적으로는 悲劇적이라기 보다는 복음 전파의 기회가 되었다고 보겠습니다. 이를테면, 꽃씨 꼬투리가 터져서 그 씨알이 사방에 뿌려진 셈이지요. 이 餘波로 예루살렘교회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각지로 흩어져,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설립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일어났던 예루살렘 교회의 수난을 야기 시켰던 주역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無名의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이방지역에 복음전도의 波紋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몇 헬라계통의 유대인들이 안디옥에 가서 유대인들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여 안디옥 교회가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설립상황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태생의 헬라계통 레위파 유대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12사도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사도의 지위에 오른 것 같이 보여 지며,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로서,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람에 대한 인격이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사울이 고향 땅 ‘다소’로 가서 10여 년간의 隱居하면서 복음전파를 위한 준비의 삶을 살고 있는 사울을 세계적인 대사도 바울의 雄志를 터뜨리며 출발의 길을 안내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다소까지 먼 길을 가서, 사울을 ‘찾으러’(ἀναζητῆσαι) 한 집 한집 물어서 그를 찾기까지, 갖은 애를 다 쓰면서 집요(執拗)하게 찾아 다녔던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회개한 후, 첫 번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에도 그를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옹호한 사람도 그였습니다.(행9:27) 이제 안디옥교회의 설립과 확장에 따라서, 비록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을 환영하지 않았지만(행9:29-30), 안디옥교회로 안내했고, 바나바 자신과 더불어 안디옥 교회에서 1년간 힘써 일하면서, 안디옥교회를 근거지로 하여서 이방세계를 향한 대 전도에 나섰던 것입니다.

 

폭스 잭슨이라는 학자는 ‘바나바’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는, “바나바는 신약의 가장 매력 있는 인물 중에 하나이다. 그는 남의 長技를 찾아보는 특색이 있었다. 재능으로는 바울보다 못했을지 모르나, Christian의 덕으로는 우월했다. 그는 질투를 모르고, 남의 허물을 용서하며 장점을 보기에 빨랐고, 형제간의 평화를 위해 타협에 주저하지 않았다. 역사의 바울은 세계 진보에 공헌한 바 크나, 바나바와 그 동류들은 세상을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바울의 위대함을 잊지 못함과 동시에 바나바가 기독교의 세계진출에 개척자였음을 잊을 수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생각해 볼 때, 본문의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초대교회를 박해한 것은 유대인의 歡心(人氣)을 얻기 위함이며,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감금한 것이 그 이유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순교의 波紋 속에 휩싸여 波紋의 바통을 이어 받은 자들은 사울의 회심, 사마리아에 전도한 빌립,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無名의 예루살렘교회의 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이방지역에 복음전도와 안디옥교회 설립, 바울로 하여금 세계 복음화의 개척을 촉매 시킨 바나바, 그리고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 투옥 등등의 파장을 열거해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일련의 크고 작은 波紋이 번져서,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그 餘波가 미쳐서 주님의 복음 속에서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 우리 민족은 역사의 구비치는 대 전환점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들이 먼저 각자의 가슴속에 바나바처럼, <주님께 대한 信仰과 대인관계에 대한 人品>이 겸비한 사람이 되어서 지극히 작은 ‘믿음과 사랑’의 波紋을 일으켜 보자는 것입니다.

 

“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일 때”(Die Glasernen Ringe=유리반지)》라는 독일의 대표적인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 1911~2002)의 작품에 대한 예화입니다. 1940년에 첫 작품이자 출세작(出世作)이 된 《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일 때》를 발표해서 ‘린저’는 하루아침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나는 여성의 섬세한 예지와 비단결 같은 필치로써 한 소녀가 성장해 가는 종교적· 정신적인 발전 과정을 파헤친 내용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을날 잔잔한 수면(水面) 위에 자신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비추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녀는 여러 사귐과 이별의 과정을 겪으면서, 불가능한 것에 마음 쓰지 않는 법을 배웠고, 전력을 다해 자기 앞에 펼쳐진 현재를 움켜잡고,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게 내버려두는 법도 배웠습니다. 성숙의 과정에서 그녀는 격정을 못 이긴 친구 ‘코르넬리아’의 자살을 겪고, 어른들의 질투로 투명한 우정이 찢어지는 체험도 했습니다. 결국 혼자가 된 그녀는 다시 성 ‘게오르크’ 수도원으로 돌아갑니다.

水面에 돌을 던질 때 생기는 파문을 보면서, 그 파문의 무늬에도 어떤 법칙이 있음을 깨닫고 인생의 해답을 찾아내었습니다. “앞으로 내 인생을 이끄는 것은 뒤엉키고 어두컴컴한 괴로움에 찬 격정이 아니라, 맑고도 냉엄한 정신의 법칙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일상에 회의를 느껴 구속된 삶의 굴레에서 무작정 뛰쳐나갔지만, 결국 두려움과 슬픔과 막막함을 한없이 느끼고 나서야, 인생을 바로 이끄는 것은 격정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삶은 깨지기 쉬운 유리반지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가슴과 함께 냉철한 머리도 필요하다면서, 때로는 돌진보다 중지가 낫고, 웅변보다 침묵이 낫다고 했습니다. 계획을 잠깐 접고, 조급하고 초조한 손을 멈추고, 감정을 뒤편으로 돌리고, 뒤엉클어진 인생을 새롭게 하려고 중지와 침묵의 이중창을 부를 때, 뿌리 깊은 성장이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성장은 고뇌와 아픔 후에 주어지고, 힘든 현실은 인간의 실존이고 통과해야 할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성장이란 조금씩 잃어가며 조금씩 포기해나가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요, 하나를 버릴 때 하나를 얻는 원리를 터득해 가는 과정이 성장이라고 했습니다. 능동적인 포기는 갈등을 줄이고, 평화를 키우게 되고, 충동과 고집은 비겁자의 삶이 된다고 했습니다. 작은 의무라도 끝까지 수행하고 자기를 극복해야 높은 언덕으로 날아오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먼저 우리 가슴에 일어나는 파문을 ‘루이제 린저’의 생각처럼 잘 통제할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배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아마 ‘바나바’도 이렇게 자신의 가슴에 일어나는 파문을 잘 통제했기에, 이웃으로, 예루살렘 교회로, 안디옥 교회로, 그리고 바울로 하여금 세계로 복음의 大 波長을 일으키게 하는 원동력이, 바나바 자신의 가슴 속에 일어난 잔잔한 파문의 여파가 그렇게 역사를 창조하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가슴에 이는 신앙, 관용 및 평화가 가족, 이웃, 교회, 지역, 그리고 조국 땅 전역에 파문이 잔잔하게 波長이 일도록 노력해 봅시다.

 

4). 결론: 스데반 자기 자신은 너무나 슬프고, 그러나 고귀한 희생의 피를 흘렸지만, 그 波紋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에 미쳐 날뛰던 사울을 회심케 하였으며, 빌립으로 하여금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으며, 無名의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종내 이방 땅 안디옥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파장의 原點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의 역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信仰과 대인관계에 대한 人品이 겸비하고 준비된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일예가 ‘바나바’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나바의 가슴 속에 기독교 세계전도에 대한 잔잔한 波紋의 震源地가 있었기에, 세계 복음전도를 향한 바울의 雄志를 터뜨릴 수가 이었다고 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작은 가슴에도 순수한 믿음과 순결한 사랑의 파문이 일어나, 그 잔잔한 파장이 이웃으로, 교회로, 점점 확대되어가는 파문의 진원지가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