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박물관열람실(72)

7. <성서 말씀 명상>: 예수님을 애태우는 제자

solomong 2024. 12. 5. 12:08

7. <성서 말씀 명상>: 예수님을 애태우는 제자

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죄인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죄인을 사랑해서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죄인을 사랑하셨고 열두제자를 택해서 사랑하셨는데 그 중에도 특별히 사랑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사도 요한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애태우는 제자였습니다.

요한은 그 형제 야고보와 함께 '보아느게'의 아들이라 할 만큼 모든 일에 열렬한 열정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지만, 지나치리만큼 과격해서 실수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를 지나다가 하늘의 불이 임할 때, 이것들을 다 태워 버리자고 소리친 것으로 미루어 보면 퍽 다혈질적인 위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野望이 높이서 주님이 임금이 되거든 좌우정승이 되게 해 달라고(막10:35~45) 주님께 간청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배욕도 강했고 다듬어지지 못한 다소 덜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접하면서 변화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은 때문입니다. 차라리 내어버리고 싶을 만한 對象이라면 주님의 마음은 편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롯 유다처럼 배반하는 제자라면 아예 그렇다고 하지만 내어버리기는 아깝고, 가까이 있으면서 속을 태우는 것이 밉살스럽기도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달라고 보챌 때, 아직 아버지가 실무에서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효자식이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장자에게는 2/3, 차자에게는 1/3을 상속하는 것이 당시 유대법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버지의 온갖 간장을 다 녹인 아들이었겠습니까?

눅 18장에 나오는 불의한(하나님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한 재판장)재판관 비유의 말씀 중에서, 한 과부가 자기의 원한을 들어 달라고 밤낮으로 번거롭게 하니(간청하는) 재판장이 말하되 "늘 와서 나를 괴롭히게 할 것이니"라며 (괴롭히다=헬라 원어의 뜻은 '후포피아조'=타박에 의하여 피부에 멍들게 하는 정도의 괴롭히는 것= 영어 성서에는 'Trouble', '애를 태우게 하다') 귀찮고 싫기도 했습니다만, 그러나 버릴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가 와서 애를 태우게 하니 그 간청을 들어주거늘, 하물며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애 간장을 태우게 하지만, 기도와 소원을 안 들어주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보채고 애를 태우는 신자의 기도가 정말 그립기만 합니다. 애를 태우는 것은 귀찮게 하고, 번거롭게 하고, 어떨 때는 마음을 슬프게 할지라도 부모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자식이 나중에 철들면 효자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탕자를 보십시오. 제 정신이 돌아와서 부모를 즐겁게 하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고분고분 일하는 척 했지만 맏아들은 창기와 함께 놀아난 동생의 歸家를 반갑게 맞지 않는 그 위선적인 태도가 아버지를 슬프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애를 태우는 신자라도 이렇게 매달리는 주의 백성이 귀엽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야곱 같은 사람은 교활하고, 꾀부리고, 욕심 많고, 축복을 독차지한 나머지 나중에 형이 두려워 '얍복강' 여울에서 천사와 씨름할 정도로 인간적인 야심이 많았고 하나님께는 애를 먹이는 자였습니다. 즉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못 삽니다"라며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한 하나님께 '떼 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아니면 안 됩니다"라며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이런 자를 하나님은 사랑합니다.

사도 요한이 과격하고, 예수님께 과분한 얼토당토않은 요구, 地上의 政丞자리를 요구한 것, 얼마나 철부지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겠다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다른 제자들에게 시샘을 내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도 요한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할 정도면, 12제자 중 組織을 離間 시켜서 그 조직을 허물게 할 정도였습니다. 이 정도면, 예수님께는 크게 애를 태우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사랑했습니다. 요한이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칭얼대기는 하지만 그의 태도가 변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가슴에 점점 불어나는 것을 주님은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의 일생동안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또 그 누구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할 자를 사랑하고, 사랑 받을 자에게 사랑받는 행복을 터득한 자가 됐습니다. 남들이 뭐하라고 하든지, 사랑하는 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려 하고, 사랑받을 수 없는 자에게 사랑받으려 하는 자는, 이유가 어디 있든지 간에 그의 불행은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자를 사랑하고 또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행복입니다. 사랑 받을 수 있는 자에게서 사랑을 거부당할 때처럼 굴욕감과 불행감은 더 없을 것입니다. 사람사이도 이런데, 하물며 우리 주님 앞에서 사랑 받는 제자,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가 우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로마서 8:33~35,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자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니…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란이나, 困苦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바울의 이 개가가 우리들의 개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른 데로 다 도망가고 없을 때, 사도 요한은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를 지는 아픔을 같이 했습니다. 종내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죽지 않고 밧모 섬에서 위대한 계시를 받게 되었고, 사랑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누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며, 누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자입니까? 그는 십자가를 지는 아픔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를 찾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밑에 있는 자를 찾습니다.

고기를 잡아도 고기보다 주님을 발견하고(요 21:7), 아무리 어둡고 캄캄해도 그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어떠한 환경에도 주님을 발견하는,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께 많은 애를 태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의 십자가 밑에 서서 있는 그런 자만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