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수필사랑마당

5. 기쁨과 슬픔의 쌍곡선​

solomong 2024. 12. 4. 11:15

5. 기쁨과 슬픔의 쌍곡선

기쁨과 슬픔은 인간의 정반대되는 대표적인 정서이다. 인간 일생을 통해서 이 두 개의 정감이 쌍곡선을 그으면서 우리 마음에, 우리 삶에 넘나들고 있다. 사람들은 다 기쁨의 정감으로 늘 살기를 원하나, 그렇지 못하고 저마다의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간에 불의로 우리 삶의 주변에, 삶의 중심에 엄습하고 파고들기도 한다.

오늘 필자는 이 정감들이 한쪽은 전부가 좋은 것이고, 다른 한편은 전부가 나쁘다는 차원에서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 두 가지가 우리 삶에 상황에 따라서는 다 필요한 것이고, 어떤 경우는 그 한계가 넘어서 인간을 해롭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때로는 적당히 이 두 가지가 쌍곡선을 그으면서 살았으면 좋겠는데, 우리 마음과 행위에 따른 결과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뜻과 상반되게 부여하신다.

다 건강하기를 원하지만, 신체의 어떤 부위로 말미암아 고통하고 심적으로 슬퍼하는가 하면, 건강은한데, 자식이 말을 듣지 않아, 슬픔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삶 들이 있는가하면, 자식이 근면하고 정직하고 영민한데, 그 뒷바라지를 잘 못해 주어서 안달하고 슬퍼도 한다. 그 외 명예, 권력, 부귀, 아름다움 등 끝없는 갈구 속에서 기쁨을 추구하나 마음대로 오지 않아서 슬퍼하는 분들이 많다.

사람들은 기쁨이 늘 넘치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그 기쁨이 한도가 넘으면 기쁨이 아니라, 쾌락으로 과용 될 때가 있다. 이럴 때, 어쩌면 쾌락은 슬픔을 불러오는 전주곡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다 슬픔의 정감을 대개 싫어하는 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슬픔의 감정이(고난, 아픔을 포함한 것) 필요한데, 그것이 결여되어서 최선이 못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세상을 비관이란 안경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매사에 비관주의자가 되어서 얼굴을 찡그리고 산다. 물론 그의 실존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겠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끈기와 용기가 없어서 그만 주저앉고 만다. 이런 삶의 스타일이 장기적으로, 또는 도가 넘으면, 우울증, 건망증, 협심증, 자살이란 극단의 종말을 고하는 유의 사람도 있다.

한편으로는 정치지도가가 진실로 백성의 슬픔의 몫을 같이 나눌 수 있어야 하는데, 전제군주나 독재자들은 민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칼을 뽑아들고 설칠 때, 그 자신은 물론이고, 그 밑에 있는 민초들도 슬픔을 맛보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지능지수는 높아서 이성, 판단 및 창조 아이디어는 누구보다 섬광처럼 그 머리에 스쳐 예리한 검처럼 날카롭고 얼음 같이 냉철한데, 그에게는 인간 냄새의 훈풍이 불지 않아 고민이고 슬퍼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위와 정 반대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고, 그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어리고, 세상만사 마디마디를 매고, 푸는 분명한 선이 없이 항상 좋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허허”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평하기를 “뼈 없는 사람”이라고 불러서, 이 사람에게는 슬픈 정감이 없고, 비감(悲感)한 감정이 없어서 그것이 또한 슬픔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가 인간에게 적당히 분포되게 해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기를 원치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러면 인간들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을뿐더러, 하나님이 없어도 좋다고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심술스럽기도 하다. 구약의 “욥”같은 사람은 신앙인이요, 의로운 사람이요, 부귀영화를 한 몸에 지닌 그런 항상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었다.

하루는 사탄이 하나님께 여쭙기를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 하리까?”해서 결국, 부귀영화, 자식들이 일시에 없어지고 자신은 피부병으로 고통하며, 친구들이 와서 빈정대고, 사랑하는 아내까지 저주하는 비참한 슬픔의 심연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도 이 욥기를 읽기를 싫어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쁨의 산정(山頂)에서, 하루아침에 슬픔의 구렁으로 빠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욥이 처음부터 절망의 소(沼)에서, 강인한 의지, 신앙 및 정감으로 서서히 승리와 기쁨의 정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모습이라면, 마치 현대인들이 한편의 드라마를 보듯이 슬픔 속에서 기쁨을 맛보는 흥이 있을 것인데, 그 반대로 아스러지는 장면들은 차마보기가 싫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창 중년. 장년기의 행복을 구가 예찬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오히려 필자는 욥기 42장 12절 이하에 처음 부귀영화보다, 그의 말년에 갑절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향유하여 장수하면서 기쁨을 누리는 그의 유종의 미를 장식하는 해피엔드(Happy End)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필자가 이상에서 기쁨과 슬픔의 쌍곡선에 일희일비하는 것을 대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슬픔의 정감을 어떻게 기쁜 환희에로 승화(昇華) 시킬 수 있는가를 논하려는 것이다.

특별히 교육자, 예술가 및 성직자는 오히려 기쁨의 감정보다는 슬픔의 예리한 정감의 소유자라야 설득력 있는 교훈, 이해 및 인생의 오묘한 진실을 가르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술가의 소질은 천부적으로도 먼저 감수성이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 역사의 불휴의 명작은 “헤헤”하는 기쁨의 소유자에게서 탄생된 것이라기보다, 인생의 깊은 고뇌, 아픔, 가난, 병고 등등의 슬픔 속에서 환희의 창작물이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가, 화가, 및 시인 등등의 사람들의 그 슬픈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다. 시인 바이런(G. G. Byren, 영국의 낭만주의자 1788-1824) 작품을 그 예로 들면서 말해 보자. 바이런의 시 가운데, “울어라 바벨론 강가에서”구약 시편 137편의 내용과 비슷하다. “울어라, 깨어진 유대의 거문고를 위해, 애도하라.......어디서 시온의 노래를 다시 들으랴. 유랑의 발길과 슬픔의 마음을 지닌 백성.......사람에게는 나라가 있으나, 그들에겐 무덤뿐이다.”

바이런의 시(詩) 세계는 감미로운 리듬의 연애 시와 비통하고 웅변적인 엘레지(elegie,悲歌)로 분류할 수 있는데, 위 작품은 슬픈 사연을 웅변적으로 읊고 있다. 그는 태어 날 때부터 절름발이로 출생하였으며,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10세 큰 아버지의 재산과 작위를 상속받아서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외국여행을 통해 쓴 “차일드 해럴드 여행”이란 시로 사람들을 매료시켰으며, 그의 유명한 말“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라는 말은 지금까지 후세인으로부터 회자되는 말이 되었다.

바이런만큼 명성과 악평을 받은 사람도 없으리만큼 양면의 세계를 살았으나, 결국 그리스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학질로 36세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다. 그는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절름발이 소년”이란 친구들로부터 조롱을 받은 것에서 인생의 슬픔을 알았고, 이것 때문에 한때 무질서한 삶도 살았으나, 그것을 시(詩)로 승화 시켰다. 또한 그의 작품“우리 둘이 헤어지던 때”라는 제목의 작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둘이 헤어지던 때/ 말없이 눈물을 흘리면서/오랜 동안의 이별이기에/가슴은 찢기는 듯하였다/그대 뺨 파랗게 질렸고/입술은 그 때 그 시각에/ 지금의 슬픔은 예고되었다/아침 이슬은 싸느랗게/ 내 이마에 흘러 내렸고/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깨우쳐 주기라도 했었던가./그대의 맹세는 모두 깨어지고 그대의 명성도 사라졌으니/사람들이 그대 이름 말하는 때에/ 나는 부끄럼을 숨기지 못한다........” 등의 시 내용이다.

이 시는 몇 해 전에 아무 말 없이 눈물지으며 연인과 헤어진-모름지기 어디엔가 나그네 길에 나셨던 작가가 재회의 기쁨을 머리에 그리면서 돌아와 보니, 그 연인은 완전히 마음이 변하여 명예롭지 못한 소문을 듣는 여자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대한 탄식과 한스러움을 노래한 것이다. 슬픔을 비탄으로 끝맺지 않고 그 슬픔을 끊어 않고, 그 슬픔의 의미를 부여해 보자는 것이다. 거기엔 반드시 그 슬픔이 주는 교훈이 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가치로 창조하는 것이 슬픔을 이기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고 할까. 슬픔을, 아픔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실존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요리해 먹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생고를 아주 없애는 종교가 아니다. 그 슬픔과 아픔을 이용해서 단물을(기쁨)소유하는 종교이다. 이것이 바로 슬픔을 승화시키는 비법이다.

베토벤이 한번은 성악 콩쿠르의 심사자로서 1등 되는 여인을 뽑은 후, “어느 날 그녀의 가슴에 누가 깊은 상처를 안겨줄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노래가 감동을 줄 수 있는 훌륭한 노래가 될 수 있다.”라고 한 말이, 바로 슬픔과 아픔이 승화된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 날 목사들이 훌륭한 영감 있는 설교를 하려면, 인생의 슬픔을 알고, 인생의 고뇌를 체험한 자만이 뭇 회중에게 은혜로운 메시지를 증거 할 수 있다고 필자는 감히 말하고 싶다.

한편의 시를 읽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슬픈 음악을 듣고도 눈물이 없다면, 어찌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이해하며, 설교할 수 있으리오. 그의 정감이 나무토막 같은 것에서 십자가의 아픔의 공명(共鳴)을 기대할 수 있으리오. 다만, 울리는 꽹과리 소리밖에 들을 수 없으리라. 그러니 너무 큰 교회 호화판 목회를 꿈꾸지 말고, 현재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충성스런 목회자들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끝.

2007. 11. 28.

山下연구원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