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44)

143. ​긍정을 위한 부정

solomong 2026. 7. 12. 09:28

 

143. ​긍정을 위한 부정

(본문: 요 1:19-28)

 

1). 서론: <긍정을 위한 부정>이라는 말은 자신의 마음과 몸을 淨化(καθαρός)시키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의 긍정(肯定)을 위하여 수많은 화려하고 매혹적인 조건의 제시나 유혹에도 단연히 부정(否定)하는 마음의 결단을 의미합니다. 흔히 우리는 그것을 一片丹心이라고 하지요.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고 줄곧 사랑의 마음, 한결같은 마음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다 그러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에스더,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사도 바울 등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모든 고난과 환난을 이겨냈습니다. 일편단심의 마음 없이는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갈 수 없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여, 오직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전부가 되었으면 합니다.

 

고려가 멸망할 무렵, 뒤에 조선조 태종이 된 이방원이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초대한 자리에서 그의 진심을 떠보고 회유하기 위하여 ‘何如歌’를 지어 불렀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에 대한 답변으로 정몽주는 ‘丹心歌’를 불러 이방원의 유혹을 거절하며, 高麗 사직(社稷)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정과 기상을 의연하게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세례요한에게서 그런 모습을 엿 볼 수 있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유대인의 물음에 대한 요한의 답변은, ①. “그리스도가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니다.”라고 부정했습니다. ②. “광야의 소리요, 단지 물로 세례를 줄 뿐이며, 신 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는 자”라고 긍정했던 것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 것입니다. (마 5:37) 엘리야는 말라기의 예언에서(말 4:5)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지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직무상으로 엘리야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부인한 것은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문자적 또는 육체적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엘리야가 아니라고 정직히 말했던 것입니다. ③. ‘그 선지자’는 모세가 예언한 오리라고 한 선지자로서(신 18:15), 메시야를 지칭한 것인데(행 3:22, 7:37. 참조),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와 다른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④. ‘소리’(φωνή) - 요한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그릇이 되고자 心中에 표현치 않은 말은 ‘소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리는 입의 말로 나타날 때는 魂의 표현이 되는 것처럼, ‘말씀’(로고스)은 우리가 듣고 또 볼 수 있는 하나님의 顯示인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씀’(로고스)에 사용된 소리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광야의 소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또한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傳令 者’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개선장군이나 정복자가 오는 길이 평탄키 위해서 미리 준비하게 하는 데서 취해진 의미심장한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말 3:1, 4:5, 눅 1:76, 막 1:2, 마 3:3, 11:10)

 

3). 본론(Context): 구약 말라기 선지자 이후 유대 땅에는 400년 동안 하나님의 종 선지자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닫혀 있었기에, 흑암 속에 갇혀 있는 침묵의 시대였습니다. 그동안 유대는 큰 나라들인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에 의해서 짓밟힌 굴종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지음에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는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어두움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요한에게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에 유대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 인들을 세례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세례 요한의 신분에 대한 질의)는 질문의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세례요한의 명성이 높아서 그를 메시아로 아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은 “네가 그리스도냐.”라는 뜻이 함축된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이때 세례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딱 잘라서 말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모호한 대답만 해도, 상당한 대접과 명성과 인기가 절정에 달할 수 있게 되는 호기였기에, 出世 街道를 달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긍정하기 위해서, 단호하게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부정했던 것입니다. 아니! 그리스도는 고사(固辭)하고라도, 엘리야라고만 해도, 아니! 모세가 예언한 오리라고 한 ‘그 선지자’라고만 했어도,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서 말마디로 성공의 길이 확 트이는 기회임에도 단연히 “아니요!”라고 연발하였던 것입니다. 하기야 일직이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衣食住로 하면서 단련한 그였기에 “예와 아니요.”라고 분명히 말하려고 이미 수련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작심하고 자기 수련에 철저했어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기독 신자들! 오직 하나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기독 신자에 어울리는 삶의 격률’을 위해서 단호한 肯定을 할 수 있는지를 저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순간순간마다 도전해 오는 ‘이것이야 저것이냐’에 대한 결단과 달콤한 속삭임으로 유혹해 오는 사탄의 유혹에 <긍정을 위한 수많은 부정>을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선 성경에 긍정을 위한 부정의 삶을 산 요셉의 예를 이야기해 봅시다.

 

형들에 의해 바로의 시위 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 간 요셉은 그 집주인의 신임을 얻어 가정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총무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근 10년을 부모의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외롭게 성장한 요셉도 이제 혈기 왕성한 아주 잘생긴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 하였더라.(창 39:6) 라고 구약성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항상 왕궁에 있어 외롭게 지내던 보디발의 아내가 건장하고 잘생긴 요셉을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며 우리가 함께 한들 어떠하리. 너도 외롭고 나도 외로우니 외로운 이들끼리 함께 있은들 어떠하리.”라고 요셉은 날마다 유혹하는 여주인의 요청을 거부하면, 어떠한 역경이 닥쳐올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보는 사람이 없으니 눈 한번 찔끔 감으면 여주인에게까지도 사랑을 받고 그러면 호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단숨에 거부합니다.

 

주인이 나에게 모든 것을 허락했지만 당신만은 내게 허락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어떻게 하나님께 득죄 할 수 있겠느냐고 담대하게 뿌리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고 아무리 험난한 고통이 따른다 해도 하나님 향한 일편단심이 변할 수 있으랴!” 결국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에 의해 옥에 갇히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이 요셉으로 하여금 한 집안의 총무의 자리에서 대국인 애급의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긍정을 위한 부정 때문에 오는 축복이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며 유혹했던 사탄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만을 외치며 마지막 순교의 자리에서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소서!”라고 기도하며 순교의 피를 한국 교회의 제단에 뿌리신 주기철 목사님의 믿음을 위한 貞節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계 기독교 역사에 우뚝 설 수 있는 성장의 거룩한 밀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Satan의 수 없는 유혹들이 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한 많은 이 세상 어떻게 산들 어떠하리.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즐기며 산들 어떠하리.”라는 유혹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담대히 외쳐야 하겠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또 죽어도 이 나그네 인생길에 아무리 환난과 역경이 닥쳐온다 해도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수 있으랴!”라는 신앙의 節槪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오래된 제 삶의 간증입니다. 할아버지는 한의사로서 이름난 명의로 치부하시어 장남 되시는 아버지와 삼촌에게 시골에 농사짓는 땅을 많이 사주셨습니다. 저의 가친께서는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배재고보 3년 때 광주 학생 사건에 참여하였다가, 퇴학당하시어 시골로 낙향하시어 일군들을 데리고 농사를 지으며 사시다가 해방 후 혼란기에 제가 11살 때 타계하셨습니다. 그 후론 저는 할아버지와 대구로 이주하였고,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조부님께서도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아버지 몫의 땅은 삼촌이 관리하며 농사를 지으며 사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일직이 제 가친에게 땅을 사주실 때, 할아버지 명의로 사주신 것을 미쳐 가친께서 소유주 명의 변경을 하지 못했고, 할아버지께서도 제 아버지 몫의 땅을 장손인 제 이름으로 명의 변경을 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대구 제일교회 전도사로 봉직할 때, 들리는 말로는 삼촌이 아버지 몫의 땅을 삼촌 명의로 등기하였다는 소문이 들려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의사표시를 하였습니다.

 

하루는 삼촌이 대구제일교회 내 제 사택에 와서, 저에게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전도사직도 사임하면 대학 공부도 시켜 주고, 제 가친 몫의 땅도 제 명의로 등기 이전 하여 주겠다고 제안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어찌할 수가 없어서 제 사택 뒤에 이상근 목사님께서 계시는 사택으로 가서 이 목사님께 相議해 보았습니다. 이 목사님의 결론은 “양 전도사 앞으로 유산되는 땅과 신앙과는 별개이니 개의치 말고, 삼촌께 양 전도사 앞으로 명의 이전해 달라고 하세요. 그 땅이면 앞으로 목회하는 데 유용할 것이니, 잘 간수 하도록 하세요.”라는 원론적인 말씀만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 사택에서 제 사택으로 오는 거리는 한 5분 정도 안 될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이 목사님 사택에서 돌아오는 그 순간에, 문득 오늘 본문 말씀인 세례요한이 ‘하나의 肯定을 위한 수많은 否定’을 하였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삼촌에게 “재산 때문에 신앙도 저버릴 수가 없고, 전도사직도 사임할 수 없습니다.”라고 單刀直入的으로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삼촌은 그 땅을 잘 간직하지도 못하고, 자식들의 등쌀(사촌들이 사업하겠다고 땅 팔아 달라는 요청)에 홀랑 다 날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저는 그 후 하나님의 은혜로 도미 유학 후, 신학교 교수, 대학교수로 여념이 없을 때, 결국 삼촌은 자결하시어 제가 가서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긍정을 위한 부정>이란 본문의 말씀을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이요. 살아 있는 기독 신자의 생생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 신자들이 세례요한처럼 절개 있는 신앙의 소유자들이 다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4). 결론: 인생의 삶이란 선택과 결단의 연속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대한 취사선택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스쳐 가는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예와 아니요. >를 분명한 결단이 요청됩니다. ‘예’보다는 ‘아니요.’가 어려울 때가 많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긍정을 위한 부정>이라는 말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淨化시키어 기독 신자의 삶을 바르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방편이라고 하겠으며, 세상과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의 긍정(肯定)을 위하여 수많은 매혹적인 조건들이 유혹해도 단연히 부정(否定)하는 마음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흔히 우리는 그것을 一片丹心이라고 하지요.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고 줄곧 사랑의 마음, 한결같은 마음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다 그러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 봅시다. 끝.

 

'04. 신약설교마당(144)'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4. 바울의 受難 자랑  (0) 2026.07.20
142. Satan의 장미 빛 유혹과의 투쟁  (0) 2026.06.28
141. 삶의 정리  (0) 2026.06.14
140. 믿음이 곧 삶이다.  (3) 2026.06.03
139. 신앙의 차원 높은 미덕  (0) 2026.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