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삶의 정리
(빌 1:20~21)
1). 서론: 바울이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주후 61-62년 경에 죄수로서 제1차 Rome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그의 순교의 장엄한 생을 마감키 위한 <삶의 정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정리의 대상은 ①. 본문 빌립보교회 교인 대표로 위로 헌금을 가지고 온 ‘에바브로디도’가 얼마 후에 得病하여 서로 간 근심꺼리가 되었다가 쾌차되어, 그를 다시 교회로 돌려보내면서 기쁨의 감사장을 보내는 것과, ②. 동시에 교회의 분쟁을 해결키 위한 자신의 투옥에 대한 신앙적인 간증을 함으로써, 분쟁이 진정되기를 바라는 애절한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③. 또한 회개한 노예 오네시모의 옛 주인 빌레몬의 용서와 사랑을 간절히 희구한 연민의 정서와, ④. 그리고 바울 삶의 정리는 깊어져서, 삶과 죽음 사이에 끼여 있지만,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겠다는 生死를 초월하는 바울의 생사관과, ⑤. 제2차 투옥된 주후 66-67년경에 가장 신실한 제자 디모데가 보고 싶어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하면서, 최후로 師弟之間의 그리움의 人情을 보여 주면서, 마지막 삶을 정리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살아온 생을 정리하면서, 그간 살아온 종적(蹤迹) 속에 아픔의 미해결장, 건강, 생계, 친족 간의 불화문제, 인간관계의 倫理問題 및 사회문제 등등의 실타래처럼 엉킨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긴 여행을 떠날 준비의 하루하루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①. 본문 요약-로마 전도에서 2 종류의 전도자 사이에 끼여 극기와 관대를 간증한 그는 일보 전진하여 삶과 죽음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 그것을 超逸(초일)하여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먼저는 환영과 배척을 뛰어넘었고, 이제는 삶과 죽음을 초월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다 그리스도 중심인 그의 강한 신앙이었습니다.
②.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간절한 소망, ἀποκαραδοκία>은 “목(κάρα)을 빼내어(α̕πό) 바라보는(δοκεῖν) 것”입니다. 학수고대(鶴首苦待)라는 말이 적합한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③.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바울의 삶은 보통 사람들처럼 자기를 위한, 가족을 위한, 향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서 일반 신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삶 그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삶의 동기요, 힘이요, 목적이요, 생각이요, 이상이요, 전부였습니다. 실로 그는 죽고 그리스도가 그의 안에서 살아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갈 2:20) 철저한 자기 생명 관점이었습니다.
④.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그에게 있어 죽음은 지상의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참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육적인 불안전한 생애에서 참되고 완전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었습니다. 통달한 사망관점이었습니다.
3). 본론(Context): 바울의 마지막 삶의 정리는 서론과 Text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는 엄숙함이 있기에 더 길게 언급할 필요성이 없을 것 같아서 예화로 바로 진입하겠습니다. 미국 일리노이 주 South Cook Country 정신병원 가정의학과 여의사 엘리자베스 쿠불러-로스(Elisabeth Kubler-Ross) 박사가 특별히 '암' 연구소를 통해 책을 저술했는데, <암 환자의 죽음에 이르는 심리적 5단계>를 1970년대 재미있게 소개한 저서 <죽음과 임종에 관하여>(On Death and Dying)라는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Eden 신학교에서 <상담심리 자격증>이 있어야만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다고 해서, St. Louis State Hospital에서 3개월간 집중적으로 어렵게 공부한 책 중에 하나입니다.)
제1단계: 부인과 고립(First Stage: Denial and Isolation)=<암>이라는 진단이 의사로부터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환자는 부인(否認)하면서 오진(誤診)이라고 화를 낸다고 합니다. 또는 죽음이 온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더 고립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제2단계: 격노(Second Stage: Anger)= "나는 윤리 도덕적으로 선한 생활을 해 왔는데, 하필이면, "왜 내냐(Why Me!)"라고 하면서 분노를 터트린다고 합니다. 대상은 의사, 간호원, 가족에게 격노를 발한다고 합니다.
제3단계: 협상(Third Stage: Bargaining)=마치 아이들이 부모가 밖에 나가 놀지 못하게 하면, "이제부터 잘 할께요, 놀게 해 주세요."! 또한 의사에게 협상 제의하듯이, 만약 오페라 가수이면,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고, 관중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화려한 모습을 남기고 죽을 수 있도록 생명 연장을 애원한다고 합니다. 또는 "자녀들의 결혼식 때까지만 살게 해 주세요!" 기도로 하나님과도 협상을 한다고 합니다. 백화점에서의 '바겐세일'은 적당히 손님을 위해서 싸게 판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제4단계: 우울증(Fourth Stage: Depression)=1). 반발적인 패배감으로, 우리 몸의 일부분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면, 인간의 기능상실에 대한 패배감 같은 것을 말합니다. 우울증은 죽음의 준비단계에서 오는 우울증인데, 얼마 있지 않으면, 죽음의 실존적 존재로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만사가 다 어둡고, 다 비관적입니다.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앉아 있게 된다고 합니다.
제5단계: 수용(Fifth Stage: Acceptance)=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가족과 의사에게 잘못했던 것을 사과하면서 즐거웠던 일들을 회상하곤 한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죽은 후에, 가족들의 염려, 행복을 빌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나의 긴 旅行을 위해 나는 준비가 되었다!"("I am ready for my long journey.")고 차분히 수용한다고 합니다. (이 5가지 단계는 암 병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제반 큰 문제가 닥칠 때도 거치는 단계라고 생각됩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칼. 히티는 "오늘이 나의 최초의 날인 것처럼, 또한 최후의 날인 것처럼 살라."고 했습니다. 최초의 날은 삶의 <감격>이 있습니다. 최후의 날은 삶의 <엄숙성>이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올 때보다, 내가 살고 간 이 세상이 나로 말미암아 더 좋게 만들고 가려는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불의와 무질서, 부정부패가 있는 곳에 정의와 질서, 그리고 청정(淸淨)이 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이 벌써 우리 실존적 삶 속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정리를 생각하면서 끌쩍거려본 詩입니다. 제목은 <초침 소리>: "한밤중 초침 소리, 천둥소리,/깜짝 놀라 내일은 다르리라 다짐하지만,/내일은 오늘의 반복이고,/오늘은 어제의 연속인 시간이여!/무심한 이름 모를 나무 잎 들! 임 그리워,/지난 일 되새기며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눈물!/대지에 哀哀로히 한 잎 두 잎 지는데,/얄궂은 인생의 귀양살이 서럽기만 하네!
염병할 늦가을 밤바람 차기만 하고,/오늘 아침 무서리 산천은 더 적막한데,/어찌 하리요. 내 앞의 된서리,/어차피 지고 갈 멍에인 것을!/돌담길 길섶에 밤벌레 애처로이 울더니,/고요한 정적만이 감도는 칠흑 속에,/ 인생들아! 생각하면서 살라고 그렇게 울어 되뇌던,/귀뚜라미 울음도 지친 듯한데!
천덕구니 까막까치 붕만말리(鵬程萬里) 먼 길을 떠나고 나면,/저 도시 인적의 거리는 환락의 웃음소리로,/멋모르는 청춘 남여 희희낙락 하겠지,/이렇게 무정한 시공은 흘러만 간다!/생명은 무심히 시들어 가고,/저기 가까운 죽음은 활개 치며,/점점 가까이 재촉하며 엄습해 오는데,/지평선 저 넘어, 어찌 살아 왔는지를 물어 올 그 임에게/무슨 대답으로 대면할지, 가슴만 조여 오네!"
주기철 목사님께서 순교 직전에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마지막 <나의 5종목의 기원>이란 설교에서,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遺産)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 역시 나중에 주님을 만나 뵈올 때, 인생 기록을 펼쳐 보시면서 잘 못 산 것에 대한 문의하시면 무슨 대답으로 해야 할지 지금부터 가슴이 조여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저마다의 삶의 기록이 映像처럼 들어 날 터이니, 마지막 삶을 淸淨하게 살아서 지난날의 잘 못 산 것에 대한 사유함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들의 삶의 정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有終의 美의 삶이 되어서, 지난날의 흉터를 가리 울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4). 결론: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 生死가 바울 자신의 ‘사는 생(生)과 죽음 (死) 사이에 끼여’있다(빌1:23)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은 두 벽 사이에 중간에 좁은 길에 서 있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차안(此岸)의 삶과 죽음의 피안(彼岸)의 경계선에 당도해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이 삶의 정리 속엔 우리를 <엄숙함>과 <진지함>으로 안내합니다. 우리 역시 이런 삶의 정리를 조용히 잘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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