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박물관열람실(72)

24. 하나님의 연민에 찬 얼굴빛

solomong 2025. 3. 29. 10:28

24. 하나님의 연민에 찬 얼굴빛

(시 67:1~3)

-2023. 6. 27. 경북노회(통합) 은퇴 목사회 모임에 설교한 것임-

 

1). 서론: 제 Blog <山下연구소>에 지난 5월에 “라일락꽃이 피는 계절”이란 제목의 수필을 써서 올렸더니, 방문자들이 인기리에 많이 읽는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 라일락꽃은 유럽에선 특히 젊은 연인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향기가 은은하고, 오래가서 처녀들이 몸에 지니는 향낭(香囊, 향을 넣어 차는 주머니)에 담기는 꽃이기도 합니다.

 

젊은 연인들이 서로 손 잡고 거니는 라일락꽃 숲길은 정말 낭만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젊은 연인에게 애정을 속삭여 주고 詩的 情緖 感情을 안아다 주는 동시에,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꽃이 바로 <라일락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청춘도 가고 인생도 노년에 접어든 우리에게는 이런 낭만적인 라일락꽃과 향기에 대한 인생론을 편다면, 후배들이 우리에게는 무관한 것이니 말하지 말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노쇠해지는 것을 서러워하지 말고, 가슴 속에 사랑도, 낭만도, 그리움도, 소망이 고갈되어 간다는 것에 슬퍼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저녁 서쪽 하늘에 황혼이 붉게, 진하게 물드는 것처럼, 장작불이 마지막 탈 때, 강한 붉은빛과 화력을 발하는 것처럼, 인생 황혼기일수록, 삶의 의욕의미를 더욱 불살라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때이지만, <힘이 많이 들게 됩니다.>

 

2). 본론(Context):​ 그래서 본문 말씀처럼,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삶과 관련된 모든 아픔과 위험에서 하나님께 하소연을 드리니, <하나님의 얼굴빛이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그들에게 평안과 구원의 길을 열어, 축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안의 축복을 내리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로 응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 성서에서도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5,000명을 불쌍히 여겨(마 14:14) 오병이어로 모두 배불리 먹게 하시고, 소경 2명을 불쌍히 여겨(마 20:34) 그들이 다시 보게 하셨으며, 나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시고(막 1:41)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멀리서 보고 측은히(불쌍히) 여겨(눅 15:20) 달려가 반겼습니다. 지금 우리의 實存은 1. 정신적으로 별스러운 의미 없이 살아가고 있고, 2. 육체적으로 날로 연약해져 질병에 허덕일 가능성이 짙으며, 3. 경제적으로도 옛날보다는 어렵게 사는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연민에 찬 얼굴빛>을 비추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절실한 실존적 존재자들입니다.

 

<불쌍히 여기심>은 <긍휼히 여기심>과 같은 뜻입니다. ‘긍휼'이란 단어도( 가엾이 여기다, 애처롭게 여기다.’를 연상시켜 주는 同義語입니다.) <특히‘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함'(רַחַם)>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의 생명이 자라고 양분을 얻어먹으며 양수 속에 떠 있습니다. 태아가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뱃속에서 태아는 어머니의 탯줄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어머니의 뱃속 아기처럼, 하나님의 연민에 찬 얼굴빛 하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도록 쉼 없이 “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로 남은 인생살이를 살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어려운 상황이지만, 인생 황혼기일수록, 그래서 보다도 더 뜻있는 유종의 미를 수(繡) 놓고 싶어서, 하나님을 향한 애련한 간구와 인생 고해(苦海)를 향하여는 보다도 아름다움과 꺾이지 않는 인종(忍從)의 시공(時空)을 수(繡)놓는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먼 후일에 우리의 걸어간 발자국을 보고, 후배들 인생의 조그마한 거울이라도 되고 싶은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여류 시인이었던 E. Dickinson(디킨슨)의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 을 달랠 수 있다면”(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라는 詩는 -“내가 만일 한 상처 입은 가슴을 달랠 수 있다면/내 삶은 결단코 공허하지 않으리라./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진정시켜 주거나/또는 한 괴로움을 시원케 주거나/또는 할딱거리는 ‘로빈 새’한 마리를 도와주어서/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면/내 삶은 정녕코 허무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후일에 詩人의 걸어간 발자국을 보고, 후배들의 인생의 조그마한 거울이라도 되게 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남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는 고통스러운 善意의 삶에서, 하나님께 <긍휼히! 불쌍히! 여겨 달라는 절실한 기도>를 드리면,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지 그 이유 중 하나-아픔을 경험=겟세마네 동산-“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하나님 무응답-<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등을 돌려 앉으시면서,’=<“너나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 하다가 죽어라!”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Moltmann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3). 결론:​ 바흐의 <마태 수난곡>의 아리아 가사에, “나의 하나님 제 눈물을 보아서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따금 눈물로 하나님께 하소연하면서 남은 석양길을 살아갑시다. 지금도 우리가 참혹하고 힘든 고난의 상황 속일 때, “하나님 저 힘들어요!”라고 기도하면, 저절로 눈물이 글썽거리게 되며, 울음을 터뜨리게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괴로워하시면서, <연민에 찬 얼굴빛>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는 것입니다. 白骨難忘의 그 은혜에 감사 찬미를 드리면서 살도록 합시다. 끝.

 

2023. 6. 28.

산밑 연구원 원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