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하나님의 연민에 찬 얼굴빛
(시 67:1~3)
-2023. 6. 27. 경북노회(통합) 은퇴 목사회 모임에 설교한 것임-
1). 서론: 제 Blog <山下연구소>에 지난 5월에 “라일락꽃이 피는 계절”이란 제목의 수필을 써서 올렸더니, 방문자들이 인기리에 많이 읽는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 라일락꽃은 유럽에선 특히 젊은 연인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향기가 은은하고, 오래가서 처녀들이 몸에 지니는 향낭(香囊, 향을 넣어 차는 주머니)에 담기는 꽃이기도 합니다.
젊은 연인들이 서로 손 잡고 거니는 라일락꽃 숲길은 정말 낭만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젊은 연인에게 애정을 속삭여 주고 詩的 情緖 感情을 안아다 주는 동시에,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꽃이 바로 <라일락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청춘도 가고 인생도 노년기에 접어든 우리에게는 이런 낭만적인 라일락꽃과 향기에 대한 인생론을 편다면, 후배들이 우리에게는 무관한 것이니 말하지 말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노쇠해지는 것을 서러워하지 말고, 가슴 속에 사랑도, 낭만도, 그리움도, 소망이 고갈되어 간다는 것에 슬퍼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저녁 서쪽 하늘에 황혼이 붉게, 진하게 물드는 것처럼, 장작불이 마지막 탈 때, 강한 붉은빛과 화력을 발하는 것처럼, 인생 황혼기일수록, 삶의 의욕과 의미를 더욱 불살라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때이지만, <힘이 많이 들게 됩니다.>
2). 본론(Context): 그래서 본문 말씀처럼,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삶과 관련된 모든 아픔과 위험에서 하나님께 하소연을 드리니, <하나님의 얼굴빛이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그들에게 평안과 구원의 길을 열어, 축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안의 축복을 내리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로 응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 성서에서도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5,000명을 불쌍히 여겨(마 14:14) 오병이어로 모두 배불리 먹게 하시고, 소경 2명을 불쌍히 여겨(마 20:34) 그들이 다시 보게 하셨으며, 나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시고(막 1:41)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멀리서 보고 측은히(불쌍히) 여겨(눅 15:20) 달려가 반겼습니다. 지금 우리의 實存은 1. 정신적으로 별스러운 의미 없이 살아가고 있고, 2. 육체적으로 날로 연약해져 질병에 허덕일 가능성이 짙으며, 3. 경제적으로도 옛날보다는 어렵게 사는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연민에 찬 얼굴빛>을 비추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절실한 실존적 존재자들입니다.
<불쌍히 여기심>은 <긍휼히 여기심>과 같은 뜻입니다. ‘긍휼'이란 단어도( 가엾이 여기다, 애처롭게 여기다.’를 연상시켜 주는 同義語입니다.) <특히‘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함'(רַחַם)>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의 생명이 자라고 양분을 얻어먹으며 양수 속에 떠 있습니다. 태아가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뱃속에서 태아는 어머니의 탯줄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어머니의 뱃속 아기처럼, 하나님의 연민에 찬 얼굴빛 하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도록 쉼 없이 “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로 남은 인생살이를 살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어려운 상황이지만, 인생 황혼기일수록, 그래서 보다도 더 뜻있는 유종의 미를 수(繡) 놓고 싶어서, 하나님을 향한 애련한 간구와 인생 고해(苦海)를 향하여는 보다도 아름다움과 꺾이지 않는 인종(忍從)의 시공(時空)을 수(繡)놓는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먼 후일에 우리의 걸어간 발자국을 보고, 후배들 인생의 조그마한 거울이라도 되고 싶은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여류 시인이었던 E. Dickinson(디킨슨)의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 을 달랠 수 있다면”(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라는 詩는 -“내가 만일 한 상처 입은 가슴을 달랠 수 있다면/내 삶은 결단코 공허하지 않으리라./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진정시켜 주거나/또는 한 괴로움을 시원케 주거나/또는 할딱거리는 ‘로빈 새’한 마리를 도와주어서/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면/내 삶은 정녕코 허무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후일에 詩人의 걸어간 발자국을 보고, 후배들의 인생의 조그마한 거울이라도 되게 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남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는 고통스러운 善意의 삶에서, 하나님께 <긍휼히! 불쌍히! 여겨 달라는 절실한 기도>를 드리면,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지 그 이유 중 하나-아픔을 경험=겟세마네 동산-“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하나님 무응답-<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등을 돌려 앉으시면서,’=<“너나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 하다가 죽어라!”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Moltmann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3). 결론: 바흐의 <마태 수난곡>의 아리아 가사에, “나의 하나님 제 눈물을 보아서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따금 눈물로 하나님께 하소연하면서 남은 석양길을 살아갑시다. 지금도 우리가 참혹하고 힘든 고난의 상황 속일 때, “하나님 저 힘들어요!”라고 기도하면, 저절로 눈물이 글썽거리게 되며, 울음을 터뜨리게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괴로워하시면서, <연민에 찬 얼굴빛>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는 것입니다. 白骨難忘의 그 은혜에 감사 찬미를 드리면서 살도록 합시다. 끝.
2023. 6. 28.
산밑 연구원 원장: 양 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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