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7. M. Luther 종교개혁의 간접적 동인(動因)

solomong 2024. 11. 1. 13:21

7.  [칼럼]: M. Luther 종교개혁의 간접적 동인(動因)

 

오늘(10. 31.)이 루터 종교개혁 490주년 기념일이다. 우리는 그간 교리적인, 성서적인 루터 종교개혁에 대한 것만을 알고 다루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 여기에 간단히 루터 종교개혁의 간접적인 동인을, 3가지 측면에서 논하고자 한다. 특히 하버드대학교의 정신분석학자인 Erik H. Erikson의 [Young Man Luther(청년루터)]의 저서에 의한 논고임을 밝히는 바이다.(W.W. Norton & Co.INC. N.Y.1962)

 

*루터의 청년기의 사건들: 1). 주후 1483년 11월 10일 루터는 밤 11시부터 12시 사이에 아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르가레테 지글러의 아들로, 독일의 작센 선제후령에 속하는 만스펠트 백작 영내인 아인슬레벤에서 태어났다. 이튼날 성 베드로 교회에서 수세하였는데, 그날이 마침 성 마르티누스의 날이었으므로 이를 따라 마르틴이라고 명명되었다.

 

2). 1501년 18세 4월, 에어푸루트 대학에 입학하여 인문학부에서 1505년까지 일반교육과정을 이수, 이 동안에 1502년 9월 B.A(문학사)를, 1505년 2월 M.A(문학석사)를 획득했다. 3). 1505년 22세에 교수자격증을 받다. 뇌우 속에서 맹세한 후에, 수도원으로 들어가다.

 

4). 1507년 사제가 되어 23세에 미사를 집행하다. 그 후, 교회 성가대석에서의 정신적 발작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심한 회의와 망설임에 빠지다. 5). 1512년 28세에 신학박사가 되다. 비덴베르그 대학에서 시편에 대한 첫 강의를 하다. 6). 성가대석에서의 일화가 생긴 이래, 거의 10년이 지난 1517년 10월 31일32세 때, 비덴베르크 있는 교회 문에 95개 조항을 못 박아 붙이다.

 

1. 아들에 대한 출세지향적인 아버지상: 아버지 한스는 상속권이 없어(당시 말자상속법에 의거해서, 한스는 망내 동생에게 상속이 돌아감으로) 1483년 가을에 아내와 함께 아이슬레벤에 이주해 와서 광부로 나갈 결심을 하였으나, 그 보다 반년후인 1484년 여름에 마르틴을 데리고 제련업의 중심지인 만스펠트로 이주했다. 마르틴은 여기서 1496년(15세)까지 양친 밑에서 양육되고 학교교육을 받았다.

 

마르틴의 조부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농부였고, 부친 한스 루터는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보잘 것 없는 광부였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아들 마르틴이 땅 위에서든지, 땅 속에서든지 전혀 흙을 만지지 않고, 권력과 부를 향유할 수 있는 법률가를 강요했다. 그 강요는 거의 아들에게 폭력적이었다고 한다.

 

루터의 아동기에는 그의 아버지 한스는 근면하고, 검소했지만, 자기와 같은 플로레타리아트적인 삶을 청산하고, 자기와 할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아들 장래의 부르죠아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서, 마르틴의 정진을 위해 자주 때렸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현대에도 부모치고 자식 대에는 자기들보다 더 좋은 신분과 부를 누리기 위한 간절한 염원을 가지는 부모상과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르틴에 있어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상한 아버지 상이 아니라, 자식의 성공을 위한 가혹하게 매를 치는 엄격한 아버지였다. 더 정확히 말해서 군림하는 아버지상이었다. 아동기의 이런 아버지 상이 그로 하여금 반항적이고 도전적이고 투쟁적인 기질을 만들어 갔다고 하겠다.

 

2. 낙뢰(落雷)사건: 1505년 7월2일(22세) 자택에서 에어푸르트로 돌아가는 도중에, 에어푸루트 북방 1Km 반 지점 시테르룸하임에서 낙뢰(落雷)를 만나 “하나님께 살려달라는 절규”를 했고,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을 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7월 17일 비로서 그는 아버지 한스와 의논 없이 자기 스스로 결단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수사회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염원했던 당대의 최고명문인 에어푸르트대학 석사학위를 따내고, 장래가 약속되는 양양한 앞길을 저버리고 수도사가 되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간절히 염원하던 법학공부를 하여 출세가도에 진입한 그 즈음, 낙뢰 사건으로 인하여 마르틴은 그의 인생의 대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것도 아버지와의 상의도 없이 하나님께 맹세한 그 약속으로 그는 수사도의 길을 걷고 말았다. 이후 아버지와의 호된 갈등과 정신적 압력은 다음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3. 성가대 석상에서에서의 정신적 실신발작 사건: 1507년 23세 때, 어느 날, 에어프르트에 있는 수도원의 성가대석에서 갑자기 바닥에 쓸어져 신들린 사람처럼 고함을 질렀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Ich bin's nit!, Non sum! Non sum!)라고 황소처럼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것은 위 심리학자(정신분석학자) '에릭슨'의 의하면, 마르틴은 맹렬한 뇌우 속에서 심한 공포를 느끼고,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블랙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때는 우등 성적으로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 직후이었다. 석사학위 뒤에는, 야망에 찬 그의 아버지는 갖은 고생을 하면서 학비를 대어가며 시킨 수년 동안의 애를 쓴 보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당시 행정직과 정계로 나아가는 도약대가 되고 있었던 법학을 공부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의 앞에는 수년간의 가장 극심한 <내적 갈등과 때로는 종교적 망설임>에의 세월이었던 것이다.

 

이 <갈등>과 <망설임>들이 결국 그로 하여금 수도원 생활을 포기하고, 중세 교황권에 대한 광범위한 <반항운동의 영적 지도자>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성가대석의 발작은 아버지가 계획한 진로를 포기하고 하나의 신적인 출발을 한 뒤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의 미래가 맹아적 어둠 속에 싸여 있었던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발작은 심리적으로 루터 자기 정체성(Identity)의 혼란이었다고 사료된다. 위의 두 가지 사건은 1518년 35세 때, 수도원장 슈다우피츠 박사는 루터가 일직이 만나보고 싶어 했던 훌륭한 아버지상이었으며, 슈다우피츠 원장은 이런 사실을 눈치 채고 루터를 현명하게 치료했던 분이었다. 공포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임을 루터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루터의 반항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교황에게, 또 가이사(로마 Caesar 황제)에게 복종할 각각 다른 차원의 의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그것은 항상 잔인하리만큼 명확한 견해를 가진 자연적 아버지에 대한 복종과, 루터가 극적이긴 하지만, 낙뢰 사건 속에서 소명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빚진 복종 사이에 정신적 분열이었던 것이다.

 

이래서 결극 루터는 농민 전쟁에 대한 부정적 시각(아버지가 증오한 농민이란 직업)을 가지었고, '면제부'에 대한 잘못된 교리에 대한 저항이 종교개혁 방향으로 터쪘다고 하겠다. 그래서 과감한 투쟁을 전개한 루터가 그의 생육사와 함께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든 간접적인 동인으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 신앙적 차원에서 신앙의 선조 다윗, 바울, 등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필을 놓는다. 끝.

 

마르틴 루터종교개혁 490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2011. 11월 15일, 山下연구소 소장: 양 견 박사 씀.